세상을 치유하는 새 예루살렘의 비전

(이글은 Hope 5L2F 재단에서 출판하는 선교저널 [Mission Journal] Summer, Vol 3/2, 2016 선교저널 [Mission Journal], pp. 6-7에 게시된 본인의 글을 수정한 것임을 알린다)

주기도문에서 “주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그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를 말하는 것일까? 세상의 가치를 대표하는 바벨론일까? 아니면 하늘의 가치를 대표하는 예루살렘일까?

요한계시록은 바벨론을 불결한 창녀로 새 예루살렘을 청결한 신부로, 바벨론은 쇠퇴해가는 세상의 제국으로 새 예루살렘은 성장해가는 하나님 나라에 각각 비교한다. 바벨론은 오물과 폐수가 흘러나오는 불모지이며 심판의 불로 황폐해진 버려진 땅이지만(요한계시록 17:3; 18:17), 새 예루살렘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가 흘러 나오는 거룩한 도시다(요한계시록 21:2; 22:1). 바벨론으로 인해 세상의 모든 나라가 병들고 멸망하지만, 새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와 생명 나무로 인해 병든 세상의 상처는 치료받고 회복된다(요한계시록 18:3; 22:2). 생명의 강이 도시를 가로지르며 세상의 모든 죽어있는 것들에 생명을 부여한다. 생명의 강은 목마른 갈증을 해소하고 절망적인 현실에 희망을 주는 축복의 샘물인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가 이 땅에서 꿈꾸고 만들어 나가야 할 도시는 바벨론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생명의 샘물은 재앙의 결과로 피와 섞인 물로 변한 죽음의 샘물과도 대조된다(요한계시록 16:4). 가난한 농부를 착취하고 기근과 굶주림을 대표하는 바벨론 제국의 경제법칙과 달리 새 예루살렘은 모든 사람이 생명의 나무에서 생명의 열매를 함께 나눠먹는 나눔의 경제법칙을 대표한다. 요한계시록은 생명나무의 잎사귀를 헬라어의 테라페이아(θεραπεία)라는 의약품으로 소개한다. 하나님이 상처받고 일그러진 세상을 고치고 보살피고 치유하고 계신다는  요한계시록의 중심 메시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생명나무의 잎사귀는 끊어진 관계, 가족, 공동체, 나라를 연결해 주고, 기후 온난화로 상처투성이가 된 지구를 회복시키고 치유한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으로 파괴하는 파괴자가 아니라 치유하고 보살피는 간호자의 이미지다(요한계시록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는 다음 책을 참조하라: Barbara Rossing, The Rapture Exposed: The Message of Hope in the Book of Revelation, 『미국의 중동정책과 묵시종말론: 요한묵시록의 희망이야기』 김명수/김진양 번역]).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은 하늘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새 예루살렘이 상처받고 일그러진 세상으로 “내려 오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한다(요한계시록 21:2). 세상을 치유하고 새롭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 오시는 것이 새 예루살렘의 비전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바벨론 유배자들의 귀환을 하나님의 만찬으로 초대받는 성례전으로 묘사하고 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서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이사야 55:1, 새번역).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바벨론 제국)의 경제논리와 달리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이사야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포로귀환)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맛을 볼 수 있는 물과 포도주로 표현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바벨론 유배자들의 귀환을 노래한 이사야 말씀을 세상을 치유하는 생명수가 새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오는 치유와 회복의 말씀으로 다시 해석한 것이다.

온 세상을 치유하는 생명의 생명수가 새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치료하시면서 손수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혹시 병에 전염될까 봐 나병환자를 멀리하거나 나병환자를 격리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자신의 손을 내밀어 만져주시고 고쳐주셨다. 예수님이 그에게 다가 가셔서 만지시는 순간 예수님의 건강이 나병환자에게 전이되어 그의 병이 낳게 된 것이다(마태복음 8:3). 즉 예수님의 치료하는 능력이 생명수처럼 흘러 나가 나병병자를 고친것이다.

아프리카 빈곤은 정치적 불안, 인종간의 갈등, 지구 온난화 등 여러가지 측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는 마실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지구 인구의 8분이 1인 무려 10억에 가까운 사람들이 깨끗한 마실 물을 구할수 없어 가난과 각종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이 오염된 도랑에서 놀고 있는 장면은 착취와 억압이 만들어 낸 오물과 폐수가 흘러나오는 바벨론을 연상케 한다. 바벨론은 아프리카에서 빈곤과 질병이라는 새로운 얼굴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에게 새 예루살렘에
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와 생명나무의 잎사귀는 과연 무엇일까?

연합감리교회 4대 선교과제 중 하나는 빈곤에서 오는 치명적 질병을 퇴치하는 것이다. 그동안 연합감리교회는 세계 보건증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특별히 “말라리아 없는 세상 만들기%ec%98%a4%ec%97%bc%eb%90%9c-%eb%8f%84%eb%9e%91 운동”은(Imagine No Malaria)아프리카 지역에 폐수를 걷어내고 생명의 강을 흐르게 하는 일환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연합감리교회는 아프리카에 단순히 모기장을 배급하는 수준을 넘어서 교육과 의료시설을 증
강시켜 빈곤으로 오는 질병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연합감리교회는 교회내의 연대와 다른 기관들과의 협력을 통해 아프리카 말라리아 박멸을 위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연합감리교회는 7천 5백만 달러 기금 모금을 계속 진행하고 있으며 북일리노이 연회도 지난 3년간 “말라리아 없는 세상 만들기 운동”을 벌였고 약 1백만 달러를 모금하였다.

건강이란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건강과 보건증진은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과 질병을 또한 예방할 수 있는 의료시설을 증강시키는 것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말라리아 없는 세상 만들기 기금은 말라리아 예방, 교육, 치료에 필요한 지역 서비스 체계를 제공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말라리아 없는 세상만들기 운동이야말로 온 세상을 치유하는 새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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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복지를 향한 여정

(이글은 웹진 <제3시대> 73호에 올린 글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수많은 미국인들은 열광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교황의 미국방문 중 언론의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것은 바로 연방의회와 유엔에서의 연설이다. 교황의 중심 메시지는 다름 아닌 보편적 복지였다. 이를 위해서 법을 만드는 의회나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 모두가 힘을 합쳐 공동이익과 결속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보편적 복지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지나친 이분법적 접근, 즉 선과 악 또는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는 분리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분리주의가 이웃과의 담을 만들고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고 미국의 이민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황은 미국이 우리가 아닌 그들이란 말을 사용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경종을 울린다. 교황은 모두를 우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 안에 진정 보편적 복지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미국인들이 반드시 들어야 할 복음이었다.

성서학자 월트 브루거만도 자신의 책 『보편적 복지를 향한 여정』(Journey to the Common Good)에서 교황과 같은 주장을 한다. 미국은 시간이 갈수록 빈부격차가 더욱 심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빈부격차를 현재 미국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까지 이야기 했다(Pew Research Center). 한국도 빈부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고 비정규직이 전체 근로자의 3분의 1을 넘어서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영구 빈곤층이 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브루거만은 구약성서의 출애굽기와 예언서 예레미야와 이사야를 통해서 본 보편적 복지의 개념을 오늘날 우리 시대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해답으로 내놓고 있다.

브루거만은 자신의 책 1장에서 출애굽기의 보편적 복지를 향한 여정을 언급하고 있다. 출애굽기의 중심 주제는 단순히 노예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보편적 복지를 향한 기나긴 여정의 출발로 볼 수 있다. 브루거만은 애굽 왕 바로를 보편적 복지를 향한 여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로 묘사하고 있다. 바로가 지배하는 애굽 제국은 당시 고대근동의 최대의 곡창지대였다. 창세기와 출애굽기는 바로가 요셉과 부와 자본을 독점하는 방식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기근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요셉에게 와서 돈으로 곡식을 사는 경제행위를 한다. 결국 애굽과 가나안 땅의 모든 돈이 요셉에게로 몰렸고 요셉은 벌어들인 돈을 바로의 궁으로 보낸다(창세기 47:14). 사람들은 양식과 교환할 돈이 다 떨어지자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을 요셉에게로 끌고 온다(창세기 47:17). 양식과 바꿀 집짐승도 다 떨어지자 사람들은 양식을 얻기 위해 자신들의 몸과 밭을 요셉에게 판다(창세기 47:19). 칼 막스의 이론에 의하면 애굽 제국의 생산수단(means of production)이 바로에 의해 독점 지배되고 있는 구조다. 결국 밭에서 생산된 것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바치는 애굽 제국의 토지법이 만들어지게 된다(창세기 47:26). 브루거만은 애굽 제국의 노예제도는 소수권력 계층의 교묘한 조작으로 인한 부와 재산의 독점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출애굽은 단순한 노예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애굽 제국의 독점경제에서 광야의 보편적 복지를 향한 대탈출인 것이다.

브루거만은 애굽 제국의 독점경제의 시작을 바로가 꾼 악몽에서 보고 있다. 바로의 꿈과 대조적으로 모세는 보편적 복지를 향한 희망의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 출애굽 한 히브리인들이 보편적 복지의 삶을 처음으로 배운 곳이 바로 광야다.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는 만나는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애굽 제국의 피라미드식 생산경제 체제와 구별된다. 첫째, 만나는 일용할 양식으로서(출 16:4), 자신에게 필요한 양만큼 만 거두어 양식을 불의하게 축적하는 애굽 제국의 독점 경제체제와 다르다(출 16:16). 둘째, 만나를 거두는 행위는 애굽 제국의 노예제를 통한 착취된 노동이 아니라 자발적 노동이다(출 16:16). 셋째, 만나를 통해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불안과 걱정으로 고통 받는 애굽의 삶과 달리 결핍 속에서도 풍성한 나눔과 감사가 넘치는 아름다운 광야의 삶을 엿볼 수 있다(출 16:18).

브루거만은 시내산의 십계명 중 안식일 준수계명은 단순히 예배가 아니라 애굽 제국의 시스템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고 더 나아가 끊임없는 소유와 부를 추구하는 물질 만능주의 삶으로부터 해방하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애굽 제국의 경제는 끊임없는 노예의 노동으로 굴러가는 사회로서 히브리 노예는 쉼 없는 노동으로 착취당했던 것이다.

마가복음 6장의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장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보편적 복지가 실현되는 방식을 예수께서 직접 보여주고 있다. 브루거만은 광야의 만나와 예수의 오병이어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 복지는 오늘날 독점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보편적 복지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는 하늘의 메시지라고 주장한다.

브루거만은 광야 시내산의 핵심인 보편적 복지사회의 메시지가 예언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브루거만은 자신의 책 2장에서 예레미야의 보편적 복지를 향한 예언자적 외침을 언급하고 있다. 브루거만은 예레미야가 다윗과 솔로몬 왕국의 종교적, 도덕적, 경제적 악행을 고발하고 있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예레미야는 다윗왕조의 악행의 최고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솔로몬의 통치를 강하게 비판한다(예레미야 9:23-24). 이어서 브루거만은 솔로몬 왕조의 번영과 부귀를 미국의 부귀영화에 비교한다. 예레미야는 솔로몬의 종교적, 도덕적, 경제적 악행을 하나님의 사랑, 정의, 공의로 맞서고 있다. 브루거만은 이 세 가지 요소는 보편적 복지사회로 나아가는 가장 중요한 하늘의 메시지라고 주장한다.

브루거만은 자신의 책 3장에서 이사야의 메시지를 통해 보편적 복지를 주장한다. 이사야서의 중심 메시지 중 하나는(특히 제 3 이사야- 이사야 56-66) 바로 포로 귀환 공동체의 재건을 위한 새로운 질서 확립이다. 브루거만은 새로운 공동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보편적 복지라는 것이다. 특별히 이사야 65장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언급하며 브루거만은 이사야의 비전은 다름 아닌 보편적 복지의 비전이라고 역설한다.

이 책은 브루거만이 2008년 10월 레젠트 컬러지에서 강의 한 내용을 토대로 2009년 1월에 출판사와 출판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바로 그때 미국은 경제위기를 맞이하였다. 브루거만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장 큰 문제가 바로 보편적 복지의 상실이라고 단정한다. 그는 구약성서의 출애굽기, 예레미야, 이사야가 꿈꾸었던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해 오늘날 우리들이 독점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보편적 복지라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만들어 나가야한다고 경고한다. 보편적 복지가 실현된 사회를 하나님 나라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나누고 섬기는 삶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나가는 하나의 거룩한 노력임에 틀림없다.

혁명자 모세: 제국에 대한 저항?

(아래글은 지난 2010년 8월 9일 필자의 블로그 Old Testament Story의 글, “Moses in the Koberger Bible (1483),” 을 수정한 것임을 알린다).

시카고 루터란 신학교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도서관 2층에 희귀문서 소장실이 있다. 15세기에서 18세기에 출판된 책들로 무려 300여권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작성한 몇몇 편지의 원본과 그가 번역한 성서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이중 오래된 성서 한 권이 내 눈에 들어왔다. 종교개혁 이전에 출판되었던 독일어 성서다 (Koberger Bible, 1483). 15세기 성서의 내용이 궁금해서 페이지를 한장 두장 넘겨보는데 한 삽화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삽화는 출애굽기 2장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출애굽기 2:1-10). 모세의 모친이 모세를 나일강에 띄워 보내고 바로의 딸은 모세를 강에서 건저내어 모세를 자신의 아들로 양육한다. 출애굽기 2장은 모세의 모친이 모세를 강에 띄워 보낸것이 아니라 강가 갈대사이에 숨겨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필자가 이 삽화에 관심을 사로잡힌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모세가 바로의 머리에서 왕관을 벗기는 장면이다. 출애굽기는 모세가 바로의 왕관을 벗겼다고 기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삽화를 그린 사람은 과연 어떤 근거에서 이 장면을 그려 넣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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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답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책 “유대 고대사” (Jewish Antiquities, 2:232-36) 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요세푸스는 출애굽기 2장을 다음과 같이 패러프레이즈 한다:

때무티스는 모세를 양자로 삼았다. 어느날 때무티스가 모세를 자신의 아버지 바로에게 데려갔다. 자신에게 자식이 없기에 바로의 대를 이을 자가 바로 모세임을 알리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데리고 온 이 아이는 강의 혜택으로 얻었는데 신의 성품을 가진 아름다운 아이로서 저의 자식으로 삼았고 앞으로 이 나라를 이어갈 왕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녀는 바로에게 아이를 건네주었고 바로는 그 아이를 가슴으로 안으면서 자신의 왕관을 아이 머리에 얹었다. 하지만 모세는 그 왕관을 바닥에 집어 던지고 발로 짓밟았다. 이는 이집트 왕국에 재앙이 임함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이집트의 신령한 학자가 이것을 보고 발끈하여 이렇게 말했다: “왕이시여! 이는 하늘이 주는 메시지로서 이 아이를 죽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집트 제국은 멸명할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이 아이를 통해 자신들이 노예에서 해방될 것을 희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때무티스는 그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모세를 잡아챘고 바로도 모세를 즉시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모세는 바로 딸의 보호아래서 교육받고 자랐다. 히브리인들은 모세를 의지하게 되었고, 놀라운 일이 앞으로 벌어질 것을 희망했다. 반면, 이집트인들은 모세로 인해 일어날 일에 대해 염려했다.

요세푸스의 글에서 한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바로가 자신의 왕관을 모세에게 주지만 모세는 왕관을 바닥에 던지고 발로 짓밟았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세푸스의 글에서 이집트 학자가 말하듯이 이집트 제국의 멸망을 의미한다. 즉 모세의 등장이 이집트 제국의 멸망을 의미함과 동시에 모세는 반 제국주의 혹은 반 왕권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히브리인들은 반 이집트 제국을 외치는 혁명자 모세를 통해 해방과 자유의 희망을 품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모세를 새롭게 보는 놀라운 해석이다. 유대인 미드라쉬 전통도 반 제국주의 혁명자 모세의 이미지를 전해주고 있다 (Tanhuma Exodus 8; Midrash Exodus Rabbah 1.26; Midrash Dueteronomy Rabbah 11.10; Yashar Exodus 131b-132b). 하지만 요세푸스는 자신이 로마제국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지적을 교묘히 빠져 나가기 위해 “모세가 어려 어린이의 장난으로 왕관을 집어 던진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Reference List

Feldman, Louis H. Josephus’ Interpretation on the Bibl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1998.

Josephus, Flavius ; Whiston, William: The Works of Josephus : Complete and Unabridged. electronic ed. of the new updated ed. Peabody : Hendrickson, 1996, c1987.

2012 in review

The WordPress.com stats helper monkeys prepared a 2012 annual report for this blog.

Here’s an excer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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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ck here to see the complete report.

사라가 본 이스마엘의 행동 (창세기 21장 9절)

창세기 21장은 이스마엘의 행동에 위협을 느낀 사라가 아브라함을 부추겨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스마엘의 어떠한 행동이 사라를 위협했던 것일까? 아래는 창세기 21장 9절의 히브리어 본문과 영어/한글 번역이다:

ותרא שׂרה את־בן־הגר המצרית אשׁר־ילדה לאברהם מצחק

  • KJV: And Sarah saw the son of Hagar the Egyptian, which she had born unto Abraham, mocking.
  • NRSV: But Sarah saw the son of Hagar the Egyptian, whom she had borne to Abraham, playing with her son Isaac.
  • 개역성경: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 표준새번역: 그런데 사라가 보니 이집트 여인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
  • 공동번역: 그런데 사라는 이집트 여자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준 아들이 자기 아들 이사악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

위의 번역에서 보듯이 KJV 성경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다”라고 번역한 반면, NRSV는 단순히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놀다”라고 번역한다. 개역성경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다”라고 번역하였고 표준새번역은 “이삭을 놀리고 있다”고 번역한 반면, 공동번역은 이스마엘이 “이사악과 함께 놀다”라고 번역한다. 과연 어떤 번역이 옳은가?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은 단순히 “이스마엘이 놀고 있다”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KJV와 개역성경의 번역처럼 전통적인 해석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한 것으로 번역한다. 아마도 이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박해하였다”고 해석한 바울의 견해에 기초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갈라디어서 4장 29절). 그러나 창세기 21장 9절의 문맥에서 볼 때 이스마엘의 행동은 “조롱”의 의미로 이해 될 수 없다 (Westermann, Genesis 12-36, 339).

문제는 본문에 사용된 히브리어 피엘형 분사 מצחק (metsakheq, 메차헥)의 해석에 달려있다. 이 단어는 동사 צָחַק (tsakhaq, 차학크, “웃다”)에서 온 것으로 피엘형은 단순히 “웃다”는 뜻이 아니라 “즐기다” 혹은 “놀이를 하다”로 번역될 수 있다. 만일 “조롱하다”라는 의미로 해석이 될려면 이 단어 앞에 히브리어 전치사 ב (be)가 필요한데, 본문은 이 전치사 없이 피엘형 분사만 존재한다. 따라서 히브리어 본문의 문맥상 이스마엘의 행동이 이삭을 조롱한 것은 아니다.

칠십인역과 불가타역은 “בנה את־יצחק” ([이스마엘이] “자신의 아들 이삭과 함께”) 라는 내용을 첨가함으로써 이스마엘이 혼자가 아니라 이삭에게 혹은 이사고가 함께 무엇인가를 했다는 의미를 분명히 한다.

같은 형태의 피엘형 분사 (מצחק , metsakheq, 메차헥)가 창세기 26장 8절에 나오는데 여기서는 이 단어가 부부관계의 육체적 접촉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이삭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껴안을 것을 블레셋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보았다.” 이 구절에 사용된 것처럼 피엘형 분사의 의미가 성적접촉을 의미한다면, 이스마엘이 이삭에 대한 동성애적 사랑을 표현한 의미가 된다 (David J. Zucker, “What Sarah Saw: Evnisioning Genesis 21:9-10, The Jewish Bible Quarterly [36/1], 2008: 54-62).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미드라쉬 문헌에도 전혀 언급하지도 않고 창세기 21장의 문맥에서 볼 때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다.

창세기 16장 16절에 의하면 지금 이스마엘의 나이는 적어도 15세로서 어린 동생 이삭을 즐겁게 해 주는 행위 이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왜 사라가 이스마엘의 행동이 위협적이었는지는 본문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Speiser, Genesis, 155).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15살 정도 나이 많은 형이라면 이스마엘이 이삭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사라에게 큰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사라는 하갈과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을 “여종”과 “여종의 아들”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그들을 철저히 “타자화” (the Other) 한다. 더 나아가 사라는 “종의 아들은 내아들 이삭과 함께 상속자가 될수 없다” (10절)라고 단언한다. 사라는 자신의 아들이 “타자” (여기서는 이집트인)의 문화와 종교의 영향을 받을까 두려워한 했을수도 있다 (S. J. Teubal, Sarah the Priestess: The First Matriarch of Genesis [Athens: Swallow/Ohio University, 1984], 40).

타자와 타자의 문화에 대한 두려움과 부정적인 창세기 저자의 입장은 에서가 헷 족속 이방연인과 혼인하여 이삭과 리브가를 근심하였다고 기록한 부분에서도 잘 드러난다 (창세기 26장 34-35). 사라는 결국 이스마엘을 이삭에게서 떠어놓는 결정을 하고 아브라함도 그녀의 제안에 동의한다 (하나님도 이 제안에 동의한다: 창세기 21장 12절).

전통적인 랍비문헌인 미드라쉬(Midrash)나 토셉타(Tosefta)는 이스마엘을 우상숭배, 강간, 유혹, 살인을 일삼는 건달로 묘사한다 (Midrash Genesis Rabbah 53.11). 이는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가 사이의 긴장을 반영한 랍비문헌의 창세기 21장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였고, 이런 이유로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집에 쫓겨난다. 그렇다면 타자와 공존할 수 없다는 본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나님은 이스마엘에게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창세기 21장 13절) 이스라마엘 울부짓음을 들이시고 큰민족을 이루게 하신다는 (창세기 21장 18절) 약속을 하시지만, 여전히 타자와 함께 공종할 수 없다는 아브라함 가정이야기는 성서를 읽는 우리들에게 더많은 질문을 하게 한다.

소안론 목사(W. L. Swallen)와 평양장로교 선교 종합단지

결혼 후 첫 가족여행을 동부쪽으로 길을 잡았다. 오하이오를 거쳐 뉴저지 그리고 펜실베니아와 메릴랜드를 통과하는 길고 먼 여정이었다. 그중 가장 의미있었던 시간은 메릴랜드 헤이거스 타운에 계시는 최종수 목사님댁 방문이었다. 그곳에서 장로교 선교사 William L. Swallen (한국이름 소안론)목사의 유품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현재 최종수 목사님이 소장하고 계시는 소안론 목사님의 유품은 18가지다 (유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최목사님의 글 “옛날 창가 ‘식목가’를 다시 부르면서“를 참고하라).

소안론 목사의 유품중 1938년 4월 3일자 평양 산정현교회 주보와 소안론 목사의 설교문 뒷면에 있는 평양 장로교회 선교종합단지 도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래 평양 산정현교회 주보는 독립운동가이자 오산학교 교장이었던 조만식 장로의 기도와 소안론 목사의 설교를 기록하고 있다.

평양 산정현교회 주보

소안론 목사는 농과대학 출신으로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소안론 목사의 약력은 조경현의 “순례자 ‘소안론’ 선교사“를 참조하라). 농과대학 출신답게 소안론 목사의 한국선교는 나무사랑과 깊은 관련이 있는것 같다. 최종수 목사님은 소장하고 계신 소안론 선교사님의 유품중 1920년 판 “챵가집”에서 유독 식목가에 큰 관심을 보이고 계신다. 최 목사님은 “옛날 창가 ‘식목가’를 다시 부르면서“라는 제목의 글에서 “식목가의 가사가 문학적 세련미는 부족하지만 나무심기를 권장하는 실천성이 강하다”고 평가한다.

나무심기와 관련하여 인천제삼교회 원로목사 김광식 목사는 “소안론 선교사의 사과나무“라는 글에서 소안론 목사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소안론 선교사가 안식년 차 미국에 갔다 오면서 사과나무 묘목 300개를 부산 항구에 내렸다. 대구에 있는 선교본부에 묘목 150개를 전달하고 대구근방 기독교인에게 나누어 주어 심게 하였다. 그리고 150개는 평양에 있는 선교본부에 전달하여 평양근처, 주로 황주에 있는 신도들에게 나누어 주고 심게 하였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나라 대구사과와 황주사과의 유래가 되었다. 그후에 우리나라 사과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종류도 개량하여 농산물 소득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과가 미국 선교사에 의하여 전해진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소안론 목사의 설교문 뒤에 있는 평양 장로교회 종합단지 도면은 더욱 흥미롭다. 이 도면은 병원, 신학교 입학처, 기숙사, 선교사(교수)와 교직원 숙소, 도서관, 평양 외국인 학교, 체육관, 그리고 본관의 위치를 보여주고 있다. 도면을 보면 마포 삼열 선교사는 29번에 거주하셨고 소안론 선교사는 17번에 거주하셨다. 도면을 보아 알수 있듯이, 과히 이곳은 1920년대 한반도에서 가장 화려한 서양식 종합교육시설이었다 (“Pyungyang ‘Jerusalem of the East’” 참조). 흥미로운 사실은 소안론 선교사 개인이 사용하는 편지지 뒷면에 이 도면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편지지 뒷면에 인쇄된 것을 보면, 아마도 선교비를 후원하거나 혹은 한반도 선교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평양 장로교회 선교시설을 보여주고자 한 의도가 아니었나 추측된다. 아니면 선교시설이 너무나 크고 복잡하여 이 도면이 지도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평양 장로교회 선교종합단지

창세기 4장 1절: 가인을 창조한 하와?

 וְהָאָדָם יָדַע אֶת־חַוָּה אִשְׁתּוֹ וַתַּהַר וַתֵּלֶד אֶת־קַיִן וַתֹּאמֶר קָנִיתִי אִישׁ אֶת־יְהוָה

  • 개역개정: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 공동번역: 아담이 아내 하와와 한자리에 들었더니 아내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외쳤다. “야훼께서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
  • 표준새번역: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다. 하와가 말하였다. “주의 도우심으로, 내가 남자 아이를 얻었다.”
  • NRSV: Now the man knew his wife Eve, and she conceived and bore Cain, saying, “I have produced a man with the help of the LORD.”
  • NET: Now the man had marital relations with his wife Eve, and she became pregnant and gave birth to Cain. Then she said, “I have created a man just as the LORD did!”

한글번역서는 공통적으로 하와가 “주의 도우심으로 남자아이를 얻었다”고 번역하는 반면, 영어번역서 NRSV는 “생산했다”로, 그리고 NET는 “창조하였다”로 번역하였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듯 하와가 가인을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이 구절에 사용된 히브리어 1인칭 동사 קָנִיתִי (qaniti) “내가 얻었다”는 동사원형 קָנָה (qanah)에서 온 것으로 “얻다”라는 뜻이다. 가인(קַיִן, [qayin]) 이라는 이름은 그뜻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이 קָנָה (qanah)라는 단어가 “창조하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창세기 14:9, 22; 출애굽기 15:16; 신명기 32:6; 시편 78:54; 139:13; 잠언 8:22 [지혜의 창조]; 우가릿 문서에서 나오는 동사 qnj [창조하다]를 참조). 칠십인역과 (κτίζω) 시리아역도 본 구절의 (창세기 4:1) 동사를 “창조하다”로 각각 번역하였다.

더 나아가서 이 히브리어 동사가 맛소라 사본 잠언서에서 “얻다”라는 의미로 12번 등장하지만, 칠십인역과 시리아역에서는 “창조”의 개념으로 번역되었다 (Whybray 1965, 504-14). 어원적으로 볼 때, 아랍어에서 가인이라는 뜻은 “짓다, 만들다”로서, “하와가 남자아이를 얻었다”라는 번역보다는 “남자아이를 창조하였다”는 번역이 더 적절하게 보인다. 하지만 맛소라 사본의 창조이야기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이 단어가 창조와 관련되어 결코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앞에서 살펴본 사본대조와 어원적 근거로 “하와가 하나님처럼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주장한다 (Westermann 1974, 289).   

본 구절과 관련하여 한가지 더 논의할 문법적 내용은אֶת (‘et)다. 히브리어אֶת 은 (1) 목적어를 표기하는 기호와 (2) “함께”라는 뜻의 전치사를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전치사 “함께”로 사용되었다. 어떤 해설자는 이 히브리어 단어를 목적어 표기기호라고 주장함으로써, “내가 남자아이- 하나님을 얻었다 (하나님의 성육신)”라고 이해한다. 이는 하와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메시야라는 창세기 3장 15절의 알레고리적 해석과 연관된다. 그러나 본 구절에서는 전치사 “함께”라는 뜻으로 사용되어 “하나님과 함께” 또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와가 가인을 창조/생산했다는 뜻이 가장 적절하다.   

참고문헌

Irwin, A. 1961. Where Will Wisdom Be Found?. JBL 80 (1961): 133-42. 

Westermann, Claus, 1974. Translated by John J. Scullion S. J. Genesis 1-11: A Commentary. Minneapolis: Augsburg Publishing House. 

Whybray, R. N. 1965. Proverbs 8:22–31 and Its Supposed Prototypes. VT 15: 504-14.

마가복음의 하나님 나라

지난 5월 21일 예수사랑교회에서 열린 시카고 지역 연합감리교 선교부흥회에 참석하였다. 유대인 부자청년의 이야기로 (마가복음 10:17-22) 이승우 목사님이 설교하셨다. 설교의 주제는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린 것으로 사람의 행위로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 말씀에 기초한 깊이 있는 설교였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본문으로 설교 할 때 보통 다음과 같은 두가지 차원에서 설교를 한다. 어떤 설교자는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하신 예수의 말씀에 힘입어 부자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설교를 한다. 또는 어떤 설교자는 유대인 부자청년의 질문과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대답을 혼동하여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는 설교를 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본문의 마지막 말씀을 놓치지 않는 반면, 이승우 목사님도 역시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고 계신다. 과연 그런가? 본문을 먼저 살펴보자.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께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 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제자들은 그의 말씀에 놀랐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하시니, 제자들은 더욱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을 눈여겨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표준새번역, 필자강조)

젊은 부자청년의 질문은 도마복음의 시작을 연상케 한다: “이것들은 살아계신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디디모스 유다 도마가 기록한 비밀어록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어록의 의미와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These are the secret sayings that the living Jesus spoke and Didymos Judas Thomas recorded. And he said, “Whoever discovers the interpretation of these sayings will not taste death.”). 도마복음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도마복음에서는 영생의 문제에 있어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중요하지 않다. 도마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어록 (114개의 어록)과 그 어록의 의미를 이해하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가복음의 부자 청년 유대인 이야기도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어야 된다는 주장은 발견할 수 없다. 영생의 문제로 고민하여 질문한 젊은 부자 유대인에게 예수는 계명 (구약성서의 십계명)을 지켰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예수는 “가진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재산이 많은 부자는 근심하면서 예수를 떠나갔다. 예수는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본문은 “영생”을 구하는 부자청년의 물음으로 시작하지만, “하나님 나라”로 대답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결론짓는다. 그럼, 마가복음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과연 무엇인가?

마가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 (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라는 말은 20번 나온다. 

  •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1:15)
  •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들린다. (4:11)
  •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4:26)
  •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9:1)
  •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9:47)
  • 그러나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10:14)
  •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10:23)
  •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하시니 (10:24)
  •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 뒤에는 감히 예수께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 (12:34)
  •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것을 마실 그 날까지, 나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 (14:25)
  • 그는 명망 있는 의회 의원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대담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하였다. (15:43)

마가복음은 시작부터 하나님 나라를 언급한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때가 찼다로 표현하고 (1:15);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바깥 사람들에게는 수수께끼이며 (4:11);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오시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9:1);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15:43). 이 본문들의 공통점은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들어가는 내세의 세상이 아니라, 이땅에서 살아서 맛보는 새로운 나라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나라가 이땅에 임하기를 바라고 소망하면서 가진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새로운 공동체 (예수운동/예수공동체)에 참여하라는 예수의 초청이 오늘 본문의 중심된 주제다. 본문은 마가복음에서 발견되는 6개의 하나님 나라 어록중 하나다: (1)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삶의 결단, 즉 유혹에 끌려서는 안된다는 말씀과 (9:47);  (2)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과 (10:14, 15); (3)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요, 그리고 또한 둘째 계명이라고 대답하신 예수의 말씀에 동의한 “선한 서기관” 이 하나님나라에 가까이 간 사람이며 (12:34); (4) 마지막 마가복음의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이며, (14:25); 그리고 (5)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묘사한 부분이다 (15:42). 즉 본문을 포함한 마가복음에서의 하나님 나라 어록은 종말론적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이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있는 주기도문에서도 발견된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고,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NRSV]).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미래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종말론적 기도문이라는 측면에서 예배가 끝날무렵 드리는 유대교의 카디시 기도문 (The Kaddish Prayer)과도 비슷하다. 예언자의 전승에서 볼 때, 하나님 나라는 가까운 미래에 다가오는 주님의 날 혹은 마지막 날을 의미한다 (이사야 13:6; 에스겔 30:3; 요엘 1:15).

결론적으로 마가복음이 이야기하는 하나님 나라는 영생과 동일시 될 수 없는 현세적이며, 변혁적이며, 혁신적인 새로운 세상에 대한 소망으로서, 예언자들의 메시지에서 발견되는 “주의 날”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남북한 성경비교: 민족화합을 지향하는 성서번역

남북한 성경비교

남한의 성경은 대한성서공회에서 출판한 개역개정, 개역한글, 표준새번역, 그리고 공동번역이 있다. 그럼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어떤 번역본을 읽고 있을까? 얼마전 일리노이주 벌링턴 연합감리교회 (Burlington United Methodist Church)의 우경아 목사로부터 기독교대한감리회 서부연회에서 출판한「남북한 성경비교」(2006) 라는 제목의 책을 선물로 받고 그 의문점이 풀렸다.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공동번역서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성서를 공부하는 필자로서는 귀한 선물이 아닐수 없다.       

감신대 구약학 교수인 왕대일 교수는 “공동번역 평양교정본에 대한 평가”라는 글에서 대한성서공회 민영진 박사의 제안에 따라 북한의 성경을 “공동번역 평양교정본”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현재 북한의 성경이 1977년에 대한성서공회에서 발간된 “공동번역 성서”에 기초한 북한식 한글표기법에 따른 북한식 공동번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기독교연맹 중앙위원회가 남한의 공동번역을 기초로 한 북한식 공동번역을 출판한 이유에 대해서는 왕대일 교수도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조선기독교연맹 중앙위원회가 공동번역서를 선택한 정확한 의도는 알수 없지만, 여러번역서 중 공동번역서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면에서 그 답을 조심스럽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한성서공회는 공동번역서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신구교가 공동으로 성서를 번역하게 되었다는 것은, 20세기 후반기에 있어서 기독교인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깊은 의미를 가진 큰 일이다. 이것은 신구교 학자들이 공동으로 인정할 수 있는 성서 원전의 성립과 바티칸 제2공의회 이래로 일어난 가톨릭교회 내의 변화가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크게 보면 신구교 지도자들이 하느님은 한 아버지시요 인류는 그의 한 자녀라고 하는 진리를 깊이 깨달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신구교가 연합하여 우리 말로 성서를 내놓게 된 것은 신구교 자체뿐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를 위하여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뜻깊은 일이다.   

공동번역 출판은 신구교가 연합하여 우리 말로 성서를 내놓은 역사적인 번역서로서 우리 민족 전체, 즉 남한과 북한의 기독교인들에게 아주 뜻깊은 일이다. 더불어 공동번역은 구약성서 학계의 권위자인 문익환 목사 (한국기독교장로회)와 작가인 이현주 목사 (기독교대한감리회)가 번역에 참여한 번역서다. 왕대일 교수는 북한기독교가 공동번역을 사용하는 것은 “교회와 교회, 교파와 교파가 하나가 되는 화해와 일치를 교회공동체의 기본 자세로 삼아야 된다는 진리를 간접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노력”이라고 평가하였다.

「남북한 성경비교」는 아래 창세기 1장 예문 페이지에서 볼수 있듯이 개역성경/공동번역성경/북한성경(성경전서)를 세 단으로 만들어 비교하여 볼 수 있도록 하였고, 성경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을 발췌하여 수록하였다.

제352회 시카고 성서연구학회

제352회 시카고 성서연구학회 모임 (Chicago Society of Biblical Research) 이 오늘 우리학교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에서 열렸다. 특별히 오늘 모임은 신약성서학 갈리디아서 수사학의 대가인 Hans Dieter Betz 의 학문을 기념하고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열렸다. 현재 시카고 지역에서 가르치고 계시는 Betz 교수님의 제자 두분이 Betz 교수님을 기념하는 찬사의 글을 올렸다: Clare K. Rothschild and Margaret M. Mitchell.

Meeting of Chicago Society of Biblical Research

세분의 학자가 논문을 발표하였다. 아래는 논문 요약문이다:

1. Revisiting the Judicial Species of Rhetoric for Galatians by Troy Martin (Xavier University)

 The primary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valuate an old suggestion by Cornelius a Lapide and Heinrich August Schott about the syntax of Galatians 1:6-7 that supports Hans Dieter Betz’s association of Galatians with forensic rhetoric. Rather than connecting εἰ μή in verse 7 to the preceding relative clauses as do all other commentators, they connect these two words to Θαυμάζω in verse 6. According to them, εἰ μή introduces a protasis for an apodosis that begins with Θαυμάζω. The resulting syntax indicates that Paul adopts the rehtorical strategy of “shifting of blame” in this attempt to persuade the Galatians to return to his gospel. Since shifting of blame is a recognized strategy in forensic rhetoric, their explanation of the syntax of Galatians 1:6-7 makes this part of the forensic species of rhetoric useful for understanding one aspect of Paul’s rhetorical strategy in Galatians.

2. The Depictions of Paul and Other Jews as Present and Former Persecutors in the Acts of the Apostles by James Kelhoffer (St. Louis University)

This paper examines persecution as a basis for legitimacy in the Acts of the Apostles. In particular it considers Luke’s negative depictions of Jews as persecutors and Luke’s characterization of Paul as the persecuted former persecutor.

3. The Cultic Status of the Levites in the Tmeple Scroll: Between hermenutics and History by Jeffrey Stackert (University of Chicago)

The complex views of Levitical cultic status in the Pentateuch continued to develop in Second Temple Jewish Literature. In several texts (e.g., Chronicles, the Testament of Levi, Aramaic Levi, Jubilees), the status of the Levites vis-à-vis the priests changes and even improves relative to their rank in pentateuchal Priestly literature. Perhaps no Second Temple text, however, is more noteworthy on the question of the relative status of priests and Levites than the Temple Scroll. By both mediating between biblical Priestly and Deuteronomic perspectives and innovating beyond them, this text introduces cultic privileges for the Levites unattested in other Second Temple literature. In this paper, I will attempt to explain the Temple Scroll authors’ exegetical engagement with their biblical sources as a basis for their novel presentation of Levitical cultuc rights. I will also consider the historical conditions that facilitate the legal innovations that the Temple Scroll introduces with regard to Levitical cultic status